[데일리투데이 신보경 기자] ‘쿵!’ 고수의 구수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북 장단이 울리고, ‘착!’ 부채가 펼쳐지면서 구성진 가락이 얹어진다. 밀고 당기는 음률을 입은 서사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시원한 ‘창(昌)’과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하는 ‘아니리’, 이를 더욱 생동감 있게 살리는 창자(昌自)의 몸짓 ‘발림’이 어우러진 ‘판소리’는 우리네 전통미가 담긴 종합예술 그 자체다. 2003년 유네스코(UNESCO)로부터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그 예술성과 역사적 가치에 국제적 관심이 더해지고, 명실상부 ‘진짜배기’ 한류(韓流)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리고 그 기반을 닦는 데에 평생을 걸어온 사람, 바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예능보유자 國唱 신영희 명창이 있다. 소리인생 77년, 판소리 역사 속 중심에 있던 산증인이자 누구보다도 ‘소리’를 사랑하는 그녀의 삶 일대기를 만나보았다.
11살, 소리의 길에 첫 발을 내딛고 목포 유달산 폭포 아래 첫 ‘득음(得音)’을 갈고 닦다
전남 진도에서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 宋萬甲(1865~1939)의 맥을 이은 신치선 (申致先,1899~1959) 선생의 딸로 태어난 그는 당시 후학양성을 하시던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듣고 보던 11살, 본격적인 소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재능은 기특하나, 결코 만만치 않을 길 위에 첫 발을 내딛은 딸에게 닥칠 앞으로의 고행이 걱정된 부친은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결국 딸을 제자로 두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진도로 떠나오기 전 부친은 자신의 스승 김정문과 함께 문을 열었던 관립극장 협률사에서 활동하며 익혔던 소리들을 딸에게 전수해준다. 그렇게 ‘흥부가’의 ‘박타령’, ‘춘향가’의 초입부, ‘심청가’의 초입부의 타령 등을 배우며 ‘될성부른 잎은 떡잎부터 남다르다’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소녀의 소리는 날로 익어갔다.
청춘, 고행 속에서 스승 여덟 분을 모시며 ‘소리의 맛’이 더 깊어지다
배움에는 즐거웠지만 고되었다. 아버지 신치선 선생 외에도 명창 박동길(朴東實, 1897~1968) 의 스승이기도 한 안치선(安基先) 선생에게 ‘적벽가’와 ‘춘향가’ 후반부 대목을 배우던 3년간 소녀는 매일 새벽이슬을 맞으며 유달산으로 올랐다. 유달산에 올라 폭포수 옆 호젓이 자리한 작은 굴 안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목청을 다듬었다. 자연의 울림을 이겨가며 거칠지만 화통하고 섬세한 성음(聲音)의 기본기를 이루는 데에 하루가 꼬박 흘러갔다.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니 곧 그의 소리는 진도에서 명성을 떨쳤다. 내심 어린 딸의 영민한 재능을 자랑스러워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곳곳을 다녔다.
목포로 올라와 좀더 큰 무대를 꿈꾸게 되었던 16살, 아버지가 지병으로 작고하시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홍주를 내리며 다부지게 살림을 이끌어가시던 어머니마저 건강이 나빠지면서, 실질적인 가장(家長)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큰 오빠와 어린 남동생의 학비 그리고 생활비와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일선에 나섰다. 늘 단정한 머리에 한복 옷매무새를 차리고 ‘소리’를 찾는 자리 어느 곳이든 향했다. 잔뜩 풀 먹인 버선을 신고 험한 길을 걷는 탓에 발가락이 전부 앞으로 모아질 정도로 바쁘게 생계를 꾸려갔다. 힘든 일상에서도 ‘소리’를 놓지 않았다. 끝까지 꿈을 놓지 않고 묵묵히 걸어오며 10대를 지나 20대에 접어들었을 때, 목포에서 그녀의 ‘소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립(而立)을 지나 22살에 접어들 무렵, 목포KBS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보다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높아지는 명성만큼이나 실력도 일취월장 더해갔다. 당시 안기선, 장월중선, 강도근(姜道根) 등 각기 다른 스승 여덟 분을 모시며, ‘적벽가’, ‘흥부가’,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등 5대 판소리마당을 사사받기도 했다. 이때 다시 소리를 연마(硏磨)하며 성숙하게 영글어갔다.
특히 이 시절, 신영희 명창에게는 ‘판소리의 유파(流波)’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보통 판소리의 유파는 제(制)를 붙여 대표적으로 동편제•서편제 등 동서 지역적 특색이나 계보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신영희 명창은 이러한 특징적 요소보다도 ‘소리’ 자체가 지닌 음미(音味)로 나누어지며 더 나아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한데 어우러지는 서정성에 깊이를 더했다.
따뜻한 한 끼로 맺은 스승과 제자의 연...‘만정제(晚汀制)’의 맥을 잇다
남원춘향제 전국 명창대회에서 신인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목포는 물론 전국에 이름 석 자와 함께 그 존재감을 알리고, 바쁜 나날을 보내며 당대 내로라하는 명창들을 스승으로 모시며 다양한 유파를 터득하며, 배움에 젋음을 아낌없이 쏟던 1974년. 그 해에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다 준 인물, 만정 김소희(金素姬, 1917~1995) 선생을 만나게 된다.
목포 중앙극장에서 만정 선생의 공연 소식을 듣고 방문했던 차, 감기로 건강이 좋지 않아 단가를 채 부르지 못하시던 선생을 모셔와 온돌방 아랫목에 자리를 깔아 눕게 해드리고, 곧 세발낙지로 상을 차려드렸단다. 정성어린 밥상과 간호 덕에 공연을 무사히 마치신 만정 선생님은 서울로 올라가 직접 그에게 함께 올라갈 것을 권유했다. 이미 고향에 기반을 다 잡아둔 상태에서 타지로 떠나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두려웠지만, 1년간 고민 끝에 이듬 해 3월 상경했다. 상경 후 만정 김소희 선생의 집에서 함께 동숙하며, ‘만정제( 晚汀制)’의 맥을 잇게 되었다.
‘만정제’는 만정 김소희 선생의 판소리 유파다. 김소희 선생은 1964년 만정제 특유의 ‘춘향가’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 보유자로 지정된 ‘인간 문화재’셨다.
특히 ‘만정제 춘향가’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각각 ‘힘이 있는 소리’와 ‘애절한 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창음(昌音)은 물론 음에 드라마틱한 서사성을 더욱 살려주어 많은 이들의 이목(耳目)에 깊고 구슬픈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신영희 명창은 만정제 전수장학생이 되었고, 그렇게 스승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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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today.co.kr/news/view.php?idx=26085기사등록 2019-07-18 11:14:31